“위험 작업, 사설업체 불러라”… 실외기 수리 퇴짜 ‘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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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고양의 한 건물 외벽에 에어컨 실외기 여러 대가 선반에 의지해 매달려 있다. 대기업 서비스센터 측은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후 해당 공간이 작업 불가 지역으로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독자 제공
지난 1월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이후 일부 기업이 안전 문제가 발생할 만한 작업 자체를 기피하는 사례가 나오고 있다. 근로자들이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는 게 법 취지지만, 사고 위험이 있는 일을 영세 하청업체로 넘기면서 ‘위험의 외주화’가 오히려 심화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18일 국민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경기도 고양에서 스터디카페를 운영하는 박모(57)씨는 지난 6월 고장난 에어컨 실외기를 반년 만인 지난 16일에야 고칠 수 있었다. 고장 이후 줄곧 AS를 요청했지만, 해당 제품의 유지·보수를 담당하는 한 대기업 서비스센터는 “안전상의 이유로 수리를 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문제가 된 실외기는 건물 외부에 설치된 좁은 테라스 공간에 놓여 있다. 2019년 에어컨 구입 당시 담당 기사는 선반을 이용해 2단으로 실외기를 설치했다. 고장난 실외기는 상단에 있었다.
서비스센터 측은 추락을 막아줄 난간이 1m 높이밖에 되지 않아 사다리 등을 이용해 실외기 수리 작업을 하기 어렵다고 했다. 차량 출입도 어려운 곳이라 사다리차나 작업대를 둘 수도 없었다. 업체 관계자는 “난간을 높이는 공사를 하거나, 사설 업체를 통해 실외기를 다른 공간으로 옮기면 수리를 진행하겠다”고 답했다.
빌딩 관리업체는 난간 자체를 높일 수는 없다며 거절했다. 남은 건 사설 업체를 통해 실외기를 떼어서 실내로 옮기는 방법뿐이었다. 박씨는 “설치할 때는 문제없이 해 주더니, 왜 수리할 땐 안 된다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에어컨 서비스센터를 운영하는 대기업 자회사 측은 에어컨 최초 설치 시점은 중대재해처벌법 제정 이전이었지만, 법 시행 이후 해당 공간이 수리 불가 지역으로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특히 해당 업체는 에어컨 수리를 하던 직원이 추락해 사망한 사고로 지난 7월 중대재해처벌법으로 송치된 적이 있다. 그 이후 안전 매뉴얼이 강화됐다는 것이다. 업체 관계자는 “과거에는 다소 위험한 환경에서도 엔지니어들이 고객 요청에 따라 수리를 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지금은 안전 위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박씨는 기온이 뚝 떨어져 에어컨을 통한 온풍 기능 없이는 가게 운영이 어려워지자 결국 지난 16일 사설 업체를 불러 작업을 했다. 이 업체가 100㎏이 넘는 실외기를 실내로 옮기자, 공식 서비스센터 기사들이 수리를 했다. 이후 사설 업체가 다시 선반 상단에 실외기를 설치했다.
전문가들은 중대재해처벌법의 허점이라고 분석했다. 김의수 한국교통대 안전공학과 교수는 “매뉴얼이 업체 책임을 피하기 위한 측면에만 초점을 맞추면서 소비자가 그 책임을 일부 떠안게 된 것”이라며 “위험 작업이 또 다른 영세 업체들에 떠넘겨지는 건 위험의 외주화를 부르는 결과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제조업 전반에서 임시방편으로서의 매뉴얼이 아니라 산업 전반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 규정과 매뉴얼을 다듬을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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